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북베트남의 [[구정 공세]] ==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설 연휴 동안의 관습적 휴전 기간에 미리 잠입한 병력을 통해 남베트남 주요 대도시에 동시 다발적인 선제 공격을 감행한 사건이다. [[베트남어]]로는 Sự kiện Tết Mậu Thân, 영어로 Tet Offensive이기 때문에 [[구정 공세|테트 공세]]로도 알려져 있다. 이 '''구정 대공세'''는 베트남 전쟁의 운명을 가른 사건이었다. 베트콩들은 남베트남의 주요 기관들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고, 도리어 처참하게 대패를 당했다. 그러나 주월 미국 대사관 1층이 베트콩에게 공격당하고 점령당하는 모습이 TV를 통해 미국에도 생중계가 되었다. 그래서 미 지상군이 베트남에 상륙한 시점부터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다.'라는 언론의 보도가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인들에게 심한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즉 군사적으로는 그동안 보존했던 게릴라 전력들을 요새화된 거점들에 꼬라박는 대패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대사관에 발 한짝 담그는 사진 한 장 건진 것으로 대승했다. 이로 인해 미국 내에서 반전 여론이 고조되었다. 구정 공세 이전인 1967년 12월까지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은 대략 20,000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기레기|미국 기자들은 확인도 없이 즉각 송고를 해버렸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훗날 걸프 전쟁 때 자국 내 언론인들을 전쟁 지역에 철저히 출입 금지한 것도 거짓 여론 때문이다. 단 미라이 학살은 구정 공세와 달리 송고 전 검증을 했다. 물론 미 지상군이 베트남에 상륙했던 1965년 시점부터 일부 학생들과 시민들이 주도한 베트남 전쟁 반전 운동이 있긴 했다. 그러나 전쟁이 점차 수렁텅이에 빠지고 1968년 구정 공세 당시의 여러 장면들이 방송을 통해 전파되자 반전 운동이 격화됐다. 자세한 내용은 [[구정 공세]] 문서 참고. 북베트남군은 이 당시 [[후에 대학살]]을 자행한 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